파리 조약 (17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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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 조약 (1763년)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의 종결을 위해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대부분의 영토를 영국에 넘겨 패권을 상실했으며,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하고 루이지애나를 획득했다. 영국은 캐나다, 플로리다 등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며 식민지 패권을 강화했고, 이는 산업 혁명 발전의 기반이 되었지만, 북미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통제 강화로 미국 독립 전쟁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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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3년 조약 -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1763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간에 체결되어 7년 전쟁을 종결하고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배권을 확고히 한 조약이다.
파리 조약 (1763년) | |
---|---|
조약 정보 | |
이름 | 파리 조약 (1763년) |
정식 명칭 | (없음) |
유형 | 조약 |
배경 | 7년 전쟁(미국에서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알려짐)의 종결 |
체결일 | 1763년 2월 10일 |
체결 장소 | 파리, 프랑스 왕국 |
서명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 |
당사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 |
협상가 | 존 러셀, 제4대 베드포드 공작(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세자르 가브리엘 드 쇼아젤, 프라슬랭 공작(프랑스 왕국) 헤로니모 그리말디, 제1대 그리말디 공작(스페인 제국) |
위키소스 | 파리 조약 (1763년) |
![]() | |
전쟁 결과 | |
결과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세계 최고의 식민 제국으로 부상 |
관련 조약 |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파리 조약 (1783년) |
지도 정보 | |
기타 정보 | |
추가 설명 |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카르나티크 전쟁 등의 종결을 위한 조약 |
2. 조약 체결의 배경
이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벌어졌지만,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프랑스령을 둘러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14] 영국은 1년에 600만파운드의 설탕을 생산하는 과들루프와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캐나다 중 어느 쪽을 차지할지 오랜 논쟁 끝에, 전략적 이유로 캐나다를 유지하고 과들루프는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14]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유럽 강국이었습니다. 영국 총리 뷰트 경은 프랑스를 제2차 전쟁으로 몰아넣지 않는 평화를 원했습니다.
프랑스는 퀘벡 등 캐나다 영토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할양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할양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4] 또한 세네갈을 영국에 할양하고, 일부 상업 도시를 제외한 인도의 식민지를 포기하여 인도에서 사실상 철수하게 되었다. 영국은 스페인에게서 마닐라와 아바나를 반환받는 대신 플로리다를 획득했다.
영국은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를 거느리는 것에 대해 우려했지만, 추방이나 강제 개종을 통해 프랑스를 자극하거나 프랑스 정착민들이 북아메리카의 다른 프랑스 식민지로 이주하여 세력을 강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뷰트 백작과 달리, 프랑스 외무장관인 쇼이젤 공작(쇼이젤 공작(Étienne François de Choiseul))은 전쟁 재개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재건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습니다.[15] 프랑스는 수익성이 높은 사탕무역을 하는 카리브해 영토를 광대한 캐나다 땅(프랑스에 재정적 부담이었던)[16]보다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프랑스 외교관들은 미국을 견제할 프랑스가 없다면 식민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캐나다에서 프랑스는 영국 왕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려는 귀족 등이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17]
3. 조약의 주요 내용
전쟁 중 영국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캐나다, 과들루프, 세인트루시아, 마르티니크, 도미니카, 그레나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토바고, 프랑스의 팩토리(무역 기지)(인도), 노예 무역 기지(고레, 세네갈 강 및 그 정착지), 그리고 스페인 식민지인 마닐라(필리핀)와 하바나(쿠바)를 정복했다.
이 조약으로 대부분의 영토가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되었지만, 영국은 상당한 이득을 유지했다.[4]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과 포르투갈에 대한 모든 정복지를 반환했다.[5] 영국은 마닐라와 하바나를 스페인에,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세인트루시아, 고레, 그리고 인도의 팩토리들을 프랑스에 반환했다.[6] 그 대가로 프랑스는 캐나다, 도미니카, 그레나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토바고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했다.[7]
프랑스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동쪽 절반, 즉 미시시피 강에서 애팔래치아 산맥까지의 지역을 영국에 할양했다.[8] 프랑스는 이미 3개월 전에 폰텐블로 조약에서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비밀리에 양도했지만, 스페인은 1769년까지 점령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했다. 프랑스는 인도의 팩토리들을 되찾았지만, 주요 인도 원주민 국가의 통치자로 영국의 의뢰인들을 인정하고 벵골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은 영국령 온두라스(현재 벨리즈)의 요새를 철거하기로 동의했지만, 그곳에 로그우드 벌목 식민지를 유지했다. 영국은 새로운 신민들이 가톨릭을 실천할 권리를 확인했다.[9]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제외하고 북아메리카 본토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해역의 어업권과 어부들이 어획물을 말릴 수 있는 생피에르 미클롱의 두 개의 작은 섬을 유지했다. 대신 프랑스는 캐나다보다 더 귀중하다고 여겼던 설탕 식민지인 과들루프를 되찾았다.[10]
1763년 조약 제7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13]
3. 1. 영토 교환
프랑스는 퀘벡 등 캐나다 영토와 미시시피 강 동쪽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할양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할양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4] 또한 세네갈을 영국에 할양하고, 일부 상업 도시를 제외한 인도의 식민지를 포기했는데, 이는 인도에서 사실상 철수하는 것을 뜻했다. 영국은 스페인에게서 마닐라와 아바나를 반환받는 대신 플로리다를 획득했다.
영국은 마닐라와 하바나를 스페인에,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세인트루시아, 고레, 그리고 인도의 팩토리(무역 기지)들을 프랑스에 반환했다.[6] 그 대가로 프랑스는 캐나다, 도미니카, 그레나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토바고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했다.[7]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해역의 어업권과 어부들이 어획물을 말릴 수 있는 생피에르 미클롱의 두 개의 작은 섬을 유지했다.[10]
3. 2. 덩케르크 문제
조약 체결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주요 분쟁 사항 중 하나는 프랑스 해안 마을 덩케르크 요새의 지위였다. 영국은 오랫동안 덩케르크가 프랑스의 영국 침공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될 것을 우려해 왔다.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영국은 프랑스가 요새화에 극도로 제한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1748년 아헨 조약에서는 더 관대한 조건이 허용되었고,[18] 프랑스는 그 마을에 더욱 중요한 방어 시설을 건설했다.
1763년 조약에서 영국은 프랑스가 1713년 조건을 수용하고 그 이후에 건설된 요새를 철거하도록 강제했다.[19] 이는 프랑스의 지속적인 불만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에서 그 조항이 뒤집히게 되었다. 이 조약은 미국 독립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3. 3. 종교적 자유 보장
조약 제4조는 캐나다에서 가톨릭 신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4] 조지 3세는 영국 법률 내에서 가톨릭교를 허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이는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부, 사법 및 관료 임명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법(Test Acts)을 포함했다.[25] 이들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자코뱅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는데, 자코뱅들은 보통 프랑스에 거주하며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25] 퀘벡에서는 시험법이 다소 완화되었지만, 주지사직과 같은 최고 직책은 여전히 성공회 신자들이 차지했다.
제4조는 또한 캐나다의 다른 지역과 다른 퀘벡의 독특한 법 체계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영국에는 정복을 통해 얻은 식민지가 기존 법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반적인 헌법 원칙이 있었다.[26] 하지만 이는 국왕의 특권(royal prerogative)에 의해 제한되었는데, 이는 국왕이 정복된 식민지의 승인된 법률을 나중에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조약 조항이 최우선이라는 다른 헌법 원칙 때문에 그러한 권한을 없앴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퀘벡의 하급 법정에서 배심원이 될 수 있었고, 프랑스 법의 원칙에 따라 주장할 수 있었다.[27] 하지만 판사는 영국인이었고, 프랑스 법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제한적이거나 적대적일 수 있었다. 상급 법원에 항소하는 경우 프랑스 법이나 로마 가톨릭 배심원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28]
현재 캐나다의 해양 주(Maritime Provinces)에 거주하는 많은 프랑스인들은 아카디아인 추방(1755~1763) 기간 동안 추방되었다. 평화 조약 체결 후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일부 권리를 보장하자 일부 아카디아인들이 캐나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노바스코샤 영국 식민지에 환영받지 못했다.[29] 이들은 뉴브런즈윅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결과 뉴브런즈윅은 이중 언어 사용 주가 되었다.[30]
4. 조약의 영향
이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인디언 전쟁은 일단락되었으며, 영국이 인도와 북미 식민지 패권을 확립하여 산업 혁명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식민지 항쟁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했다.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대한 경제 통제를 강화했고, 이는 북미 이민자들의 반발을 불러 미국 독립 전쟁을 초래했다.[14]
퀘벡은 프랑스인의 후손이 그대로 현재까지 계속 살고 있어서, 캐나다에서 민족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영국 총리 뷰트 경은 프랑스를 다시 전쟁으로 몰아넣지 않는 평화를 원했다.[15] 반면, 프랑스 외무장관인 쇼이젤 공작(에티엔 프랑수아 드 슈아죌)은 전쟁 재개를 예상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재건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다. 프랑스는 수익성이 높은 사탕무역을 하는 카리브해 영토를 광대한 캐나다 땅(프랑스에 재정적 부담)보다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16] 프랑스 외교관들은 미국을 견제할 프랑스가 없다면 식민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에서 별도로 평화 조건을 협상해야 했다. 파리 조약 체결 후 수십 년 동안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영국의 배신으로 비난했다.
4. 1. 영국의 패권 확립과 산업 혁명
이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인디언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영국이 인도와 북미 식민지 패권을 확립했다. 영국이 광대한 시장을 확보한 것은 산업 혁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4] 그러나 장기간의 식민지 항쟁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왔다.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대한 경제 통제를 강화하여 북미 이민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4. 2. 미국 독립 전쟁의 발발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인도 및 북미 식민지 전쟁은 종결되었고, 영국은 인도와 북미 식민지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이는 영국이 거대한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산업 혁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식민지 항쟁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했다.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대한 경제 통제를 강화했고, 이는 북미 이민자들의 반발을 야기하여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34]많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식민지 주민들은 파리 조약에서 가톨릭교에 대한 보호 조항에 실망했다.[23] 영국 식민지 정부가 가톨릭에 대해 충분히 반대하지 않는다는 비판과 퀘벡을 넘어 가톨릭에 대한 보호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는 미국과 영국 관계의 단절로 이어져 미국 혁명의 많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3]
4. 3. 캐나다 퀘벡 문제
이 조약으로 영국은 프랑스가 소유했던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퀘벡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양보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영국의 총사령관 제프리 암허스트는 "많은 캐나다인들은 자신의 식민지를 프랑스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나라가 영국에 할양되었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31]생피에르 미켈롱은 현재도 북아메리카 유일의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으며, 1992년까지 캐나다와 배타적경제수역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퀘벡에는 프랑스인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그대로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캐나다에서 영어와 프랑스어의 이중 언어 문화(바이링구알리즘)와 다문화주의의 기원이 되었다.[35]
이 조약은 18개월 동안 캐나다에서 제한 없는 이주를 허용했지만, 영국 선박을 이용한 여행은 비쌌다.[17] 이 조항에 따라 총 1,600명이 뉴 프랑스를 떠났지만, 그중 270명만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17] 다른 프랑스 식민지를 강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영국이 의도적으로 이민을 제한했다는 주장도 있다.[17]
조약 제4조는 캐나다에서 가톨릭 신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4] 조지 3세 국왕은 영국 법률 내에서 가톨릭교를 허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이는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부, 사법 및 관료 임명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법(Test Acts)을 포함했다. 퀘벡에서는 시험법이 다소 완화되었지만, 주지사직과 같은 최고 직책은 여전히 성공회 신자들이 차지했다.
제4조는 캐나다의 다른 지역과 다른 퀘벡의 독특한 법 체계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영국에는 정복을 통해 얻은 식민지가 기존 법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반적인 헌법 원칙이 있었다.[26] 하지만 이는 국왕의 특권(royal prerogative)에 의해 제한되었는데, 이는 국왕이 정복된 식민지의 승인된 법률을 나중에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조약 조항이 최우선이라는 다른 헌법 원칙 때문에 그러한 권한을 없앴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퀘벡의 하급 법정에서 배심원이 될 수 있었고, 프랑스 법의 원칙에 따라 주장할 수 있었다.[27] 하지만 판사는 영국인이었고, 프랑스 법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제한적이거나 적대적일 수 있었다. 상급 법원에 항소하는 경우 프랑스 법이나 로마 가톨릭 배심원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28]
4. 3. 1. 아카디아인 추방과 귀환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 영국군이 아카디아를 점령하면서 "아카디아인 추방(Great Expulsion)"이 발생하여 많은 아카디아인들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로 이송되었다.[34] 파리 조약 체결 이후, 영국은 로마 가톨릭교회 활동을 허용했기 때문에 일부 아카디아인들은 노바스코샤와 케이프 브레턴 섬 등으로 돌아왔다.[34]하지만 노바스코샤 영국 식민지는 더 이상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아카디아인들은 뉴브런즈윅으로 이주해야 했다.[29] 그 결과, 뉴브런즈윅은 현재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하는 이중 언어 사용 주가 되었다.[30]
4. 4. 프랑스의 입장
프랑스는 퀘벡 등 캐나다 영토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할양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할양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4] 또한 세네갈을 영국에 할양하고, 일부 상업 도시를 제외한 인도의 식민지를 포기하여, 인도에서도 사실상 철수하게 되었다.[5][6][7][8]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제외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뉴펀들랜드 해역의 어업권과 어부들이 어획물을 말릴 수 있는 생피에르 미클롱의 두 개 섬은 유지했다. 대신 프랑스는 캐나다보다 더 귀중하다고 여겼던 설탕 식민지인 과들루프를 되찾았다.[10] 볼테르는 아카디아를 quelques arpents de neige프랑스어(몇 에이커의 눈)이라고 일축했다.
영국 총리 뷰트 경은 프랑스를 다시 전쟁으로 몰아넣지 않는 평화를 원했다. 반면, 프랑스 외무장관인 쇼이젤 공작(에티엔 프랑수아 드 슈아죌)은 전쟁 재개를 예상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재건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다.[15] 프랑스는 수익성이 높은 사탕무역을 하는 카리브해 영토를 광대한 캐나다 땅(프랑스에 재정적 부담)[16]보다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프랑스 외교관들은 미국을 견제할 프랑스가 없다면 식민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캐나다에서 프랑스는 영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려는 귀족 등이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기를 원했다.[17]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북미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1763년 조약 제4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13]
4. 5. 스페인의 입장
스페인은 영국으로부터 마닐라와 아바나를 돌려받는 대가로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었다.[4] 또한, 스페인은 1762년 폰텐블로 조약을 통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비밀리에 양도받았으나, 1769년까지 점령하지는 않았다.4. 6.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프리드리히 2세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에서 별도로 평화 조건을 협상해야 했다. 파리 조약 체결 후 수십 년 동안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영국의 배신으로 비난했다.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는 파리 조약에 포함되지 않았고, 이 두 나라는 5일 후 별도로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맺어 평화를 이루었다.[23]
5. 한국에 대한 시사점
파리 조약(1763년)은 직접적으로 한국과 관련된 사건은 아니지만, 이 조약이 맺어진 국제적 배경과 결과는 한국의 역사와 국제정치적 상황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7년 전쟁과 파리 조약은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에 맺어졌다. 이 시기 조선은 쇄국 정책을 통해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 조약 이후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세력 확장은 결국 아시아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는 조선이 19세기 후반 개항을 하고 국제 정세에 편입되는 배경이 되었다.
파리 조약은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과 국제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는 북미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잃고, 영국은 세계적인 해상 제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 질서의 변화는 조선에게도 외교적, 군사적 압박으로 다가왔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와 같은 사건들을 통해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파리 조약은 국제 관계에서 힘의 논리와 국가 간 경쟁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조선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다가 결국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는 한국에게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국력을 강화하며, 적절한 외교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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